운곡 원천석(元天錫, 1330~?)은 고려말 조선 초의 학자로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1360(공민왕 9)년에 진사시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국정이 문란해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곧바로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목은 이색 등과 함께 성리학의 보급에 큰 역할을 했으며 조선 태종 이방원의 어릴적 스승이기도 하였다.    훗날 이방원이 즉위하자 원천석을 기용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해버렸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그를 찾아 헤매다 머물던 곳에 ‘주필대’라는 표석이 남아 있는데 태종이 머무른 자리라 하여 이곳을 태종대라 부르고 있다. 그는 고려말 충신이며 학자로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의 시 한 수는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목동의 피리소리)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가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이는 고려 왕조의 몰락 앞에서 역사의 덧없음과 충신의 깊은 비통함을 읊은 시조로 70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귓전에 아련하다.    그의 주옥같은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 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사후 묘소는 치악산 자락인 원주시 행구동 산 37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자손이 많이 생긴다는 벌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봉요혈이다. 운곡의 묘소는 그의 유언에 따라 소박하게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床石)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신도비 하나가 전부이며 고려충절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 묘소의 방향도 개경으로 향하게 하였다. 원천석은 살아생전 높은 절개와 지조를 보여 후세에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았으며 사후인 1612년(광해군 4)에 원주시 호저면에 있는 칠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이곳 묘소 주변의 산세는 원주시 치악산 비로봉(1,282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용맥이 향로봉(1014.8m)에 이르기 전 하나의 봉우리(950m)를 일으키고 여기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묘소는 태종의 요청에 의해 무학대사가 소점한 자리로 일부에서는 길지로 평가하고 있지만 풍수인들 사이에서는 흉당이라는 의견도 만만치가 않다. 먼저 흉당의 의견들을 보면 혈은 ‘용진처(龍盡處)에서만 맺는다’란 풍수 원칙에 따라 이곳은 용진처가 아닌 용맥이 그냥 통과하는 과룡처(過龍處)로 기가 멈추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다음 명당이라는 의견에서는 주변 산세와 또한 묘소 주변의 혈증(入首, 蟬翼)들을 보고 이곳이 곧 진혈지다. 라고 주장한다. 실제 묘소 주변에는 혈장의 기운을 막아주는 여러 개의 요석(曜石)들이 박혀있고 주변 산세도 청룡·백호가 혈장을 잘 환포해 주고 있다. 실제 풍수에서는 혈장 주변에 박혀있는 각종 요석들을 3星(官·貴·曜)이라 하여 진혈의 증거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용진처가 아닌 과룡처라는 반론에 대해서는 이 혈장은 정상적인 혈이 아닌 괴혈(怪穴)의 일종인 기룡혈(騎龍穴)이라는 것이다. 기룡혈이란 용맥은 하나의 맥으로 형성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용맥에 따라 상하 두 겹으로 이루어진 곳이 있다. 상층맥은 중간에 혈을 맺고 하층맥은 계속 진행하는 경우인데 이는 특이한 경우로 이러한 곳의 혈장에는 반드시 혈의 증거가 되는 여러 가지 요건들을 갖추어야 한다.
최종편집: 2026-08-31 08: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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