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집을 나서면 고생이라 했다. 오늘날처럼 차편과 숙박시설이 원활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걸어서 가야하는 처지라 경상도에서 한양을 가려면 보름 이상이 걸리는 긴 여정이다.
일반백성의 나들이만 힘든게 아니라 관원들의 출장길 역시 힘들게 마련이다. 이때문에 생겨난 게 역(驛)이다. 일정 거리마다 역을 설치해 교통편의와 숙소로 활용하게 했다. 역은 교통과 통신을 위한 일종의 객사로 사람과 말이 쉬는 숙박시설인 셈이다.
물론 인본주의의 발로가 아닌 절대 왕권시대에 걸맞는 통치와 지방통제를 위한 목적이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역은 진. 한시대의 교통시설이 수. 당을 거치면서 숙소인 여관이 가미됨으로써 역참(驛站)제도로 발전해 왔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원(院)과 합처져 역참 역원으로 자리잡아 공문서의 전달과 파발 및 관리들의 출장에 이용됨으로써 왕권강화와 지방통제를 용이하게 하는 장치로 자리잡게 된다.
원은 주로 사찰에서 운영해온 숙소로 오늘날의 여관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기능축소에 따라 원을 국영으로 전환해 책임자로 종6품의 찰방을 임명하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역이 언급된 것은 19대 눌지왕 2년 왜에 인질로 잡혀있던 미해가 돌아오자 신하들이 울산지역인 굴헐역에서 맞이했다는 기록이다. 삼국사기에는 21대 소지왕 9년 478년에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하도록 했다고 나와 있어 본격적으로 교통망을 정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의 도로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개설된 것으로 도로관리 부서는 당연히 병부다. 사기에는 고구려의 평양에서 압록 이북의 국내성까지 17개의 역이 있었다고 했다. 또 진평왕 6년 584년 교통과 마필을 관리하는 승부령을 둠으로써 역의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짐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지방통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100리(40키로미터)마다 역참을 두었으며 조선은 30리(12키로미터)마다 역참을 두었다.
동경잡기에는 1390년에 하륜이 경주부에서 울주로 가는 와중에 부에서 남쪽 15리 지점에 대비원이 있었고 천왕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울주까지 90리 길을 가는데 역참이 없어 불편했다고 나온다.
이후 1397년에 경주부윤으로 부임하니 부의 동남쪽 32리 지점에 원이 준공돼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해 혜리원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참이 제도화 되면서 생겨난 단어로는 한참을 들 수 있다. 한참이란 말은 역참과 역참 사이를 의미하는 정거장의 단위이며 오늘날 한참을 기다렸다고 할때의 한참이 역참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역마살이라는 말도 역에 구비된 역마는 역에서 다른 역으로 이용자에 의해 옮겨 다닐 수 밖에 없어 역마살이라고 했다.
마패 또한 암행어사 전유물로 알려져 왔으나 본래는 단순히 역을 이용할 수 있는 증표였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숫자에 따라 1-5마패로 구분했으며 암행어사의 경우 통상 2마패를 사용했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숫자는 역참에서 이용할 수 있는 말의 범위를 표시하고 있다.
영조6년 1730년에 상서원에서 발행된 마패는 중앙에 5백개 지방에 1백60개 등 6백60여개로 암행어사 파견이 가장 많았던 당시의 마패 운용 상황을 알 수 있다. 또 역을 관리하는 일꾼을 역졸이라 하며 지방관아의 통제가 아닌 중앙직속 기구로 운영됐다.
이때문에 암행어사가 출두할 때는 지방관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역졸을 대동해 공무를 집행했다. 특이한 것은 중국 한나라때부터 10리마다 정자를 세워 원행길에 길손이 쉬어 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5리마다 단정(短亭)을 10리 거리에는 장정(長亭)을 세워 행인들이 쉬어가게 했다. 길가의 정자는 여행자의 휴식장소였던 셈이다.
한편 신라의 대외교역 창구는 오늘날의 울산으로 반구동 항만은 세계적인 무역항이었다. 때문에 서라벌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관도에는 신라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굴화역 구어역 노국역 잉보역을 비롯 대비원 혜리원 퇴로원 등이 설치돼 여행자에게 휴식을 제공했다.